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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미스 리플리와 동안미녀, 누가 더 악당일까?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연속극을 즐기는 저는, 그래서 블로그도 연속극 리뷰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만, 가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이유가 뭘까 하고 한참을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방송사마다 비슷한 소재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한때는 출생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 출생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mbc 주말연속극 <반짝반짝 빛나는>과 sbs 주말연속극 <신기생뎐>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긴 이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겠죠.

그런데 최근 월화드라마에서 mbc와 sbs가 동시에 같은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어 “어, 진짜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방송사 피디들끼리 사전에 그렇게 하자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이슈를 따라가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뿐일까?” 하고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두 드라마는 모두  학력위조에 의한 위장취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로 그렇게 하자고 짠 것이 아니라면 우연이겠지요. 방송사의 피디들이란 세상을 보는 방법이나 시각이 비슷해서 이 우연은 어쩌면 필연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미스 리플리는 침울하고 무겁게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 동안미녀는 다소 코믹하고 발랄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학력위조의 정도로 보자면 뭔가 음험한 범죄자의 냄새가 물씬 나는 미스 리플리 장미리(이다해)보다 밝고 명랑한 동안미녀 이소영(장나라)이 훨씬 죄질이 심각해보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소영은 용서해줄 수 있어도 장미리는 안 된다는 것이 이 둘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장미리나 이소영은 모두 사문서 위조에 공문서 위조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력서에 허위의 기재를 했으니 사문서 위조이고, 이에 첨부해야할 서류들, 요컨대 신분증 사본, 무슨무슨 등본, 초본 등 공적 문서도 틀림없이 위조했을 것이므로 이는 공문서 위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장미리의 동경대 졸업장 위조가 공문서 위조에 해당하는지는 저도 정확한 법률지식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이소영의 공문서 위조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회사든 이력서 한 장 달랑 받고 아무런 입사서류도 받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려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 이름으로 입사했습니다.

말하자면 34살의 나이에 고졸학력과 신용불량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다른 사람(사실은 자기 친동생)의 젊은 나이와 대졸학력, 깨끗한 신용을 훔쳐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면 이에 비해 장미리의 죄는 무엇일까요? 그녀는 남의 이름을 도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졸업장을 위조해 대학을 나오지 못했는데도 대학을 나온 것처럼 속인 것입니다. 그것도 명문 동경대학을 나온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장미리의 죄는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인계를 쓰고 있습니다. 호텔A의 유력한 이사이며 차기 사장이 확실시되는(아니 이번 주에 사장이 됐군요) 장명훈을 유혹해 자기 남자로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장명훈은 청와대의 변모 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미리가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그토록 멸시하던 유타카가 몬도그룹의 2세이며 후계자란 것을 알고 난 후에 취한 행동입니다. 장미리가 비록 살기 위해 장명훈을 유혹했지만, 일말의 진심은 있었을 거라 생각했던 저도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대체 그녀에게 진실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동안 그녀가 흘렸던 눈물들에 뒤섞여 심장을 울리던 절규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문희주의 동경대 졸업장을 훔쳐 친구를 위조 방조범으로 곤욕을 치르게 한 장본인이 본인이었음이 탄로났을 때 “그래, 나 살라고 그랬어!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고 외치던 당당한 솔직함은 과연 진심이었을까요?

그래서 앞으로 장미리를 두둔하거나 동정해줄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장미리의 죄는 본질적으로 그녀의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변호하던 저도 갈수록 뻔뻔해지는 그녀의 행동에 실망하며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우리의 동안미녀 이소영은 다릅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그녀가 저지른 위장취업이란 범죄. 학력을 속이고, 나이를 속이고, 신용불량자란 사실을 숨기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한 죄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학력을 가진, 더 대단한 스펙을 가진, 사회로부터(사실은 소수의 전문가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실력을 가진 강윤서 팀장과 대결해서 이기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그동안 했던 거짓들은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하는 장식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소영 씨는 대학도 못나왔지만, 유학을 다녀온 강 팀장보다도 더 훌륭해!”

저는 사실 장미리가 그렇게 되길 바랐습니다. 비록 동경대 출신은 아니지만 진짜 동경대 출신보다 더 대단한 실력을 호텔A에서 뽐내길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학력?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이야. 학력이란 그저 자신의 실력을 닦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그걸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건 바보짓이야” 하고 말하게 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기대 밖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기껏 졸업장을 위조한 죄밖에 없는 장미리는 자기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고도 진정한 실력자로 커가고 있는 이소영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정말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젠 제목에서처럼 “미스 리플리와 동안미녀, 누가 더 악당일까?” 하는 물음도 정말이지 부담스럽게 됐습니다. 장미리의 죄가 큰지 아니면 이소영의 죄가 더 큰 것인지 분간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아니 드라마의 양상처럼 저도 이젠 장미리가 더 나쁜 여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어쩌면 저도 알량한 남자라서 이 남자 저 남자 기웃대며 유혹하는 꽃뱀 같은 장미리가 갑자기 미워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포스팅의 제목을 달고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마음이라면, 또는 객관적으로 비교형량 했을 때, 유죄의 정도는 분명 이소영이 큽니다.

하지만 두 드라마의 양상은 두 여자 모두 학력을 위조하고 위장취업을 했지만 한 여자는 악행을 일삼는 범죄자로, 다른 한 여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착하고 실력 있는 커리어우먼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 양상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이렇습니다.

동안미녀가 그 착한 심성을 맘껏 뽐내며 남자들로부터 동정심을 뽑아내는 동안 미스 리플리는 보다 더 비열하고 보다 더 원색적인 악행을 일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자의 성을 이용한 줄타기가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코드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미스 리플리 장미리(이다해)와 동안미녀 이소영(장나라)

그러나 어떻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두 사람이 살아온 문화적 배경, 그러니까 이력이나 스펙 이런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외침에 그리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 정도의 스펙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돈이 들어간 줄 알기나 해? 당연히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지. 실력은 그 다음 문제야. 서울대를 나왔으면 당연히 서울대 나온 만큼의 평가를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외칩니다. “공부해라, 공부해. 공부해서 남 주니?” 혹은 이렇게도 윽박지릅니다. “제발 공부 좀 해라. 나중에 커서 뭐가 될래? 공부 못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기는커녕 길거리에 수박장사나 공장 노동자밖에 못 되는 거야.”

그리하여 세상 모든 부모들은 등골이 더욱 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는 반값등록금 투쟁 기사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당사자인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어째서 별로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여기에 대해 어떤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건 자기들 문제가 아니라서 그래. 지들이 돈 내나? 어차피 돈은 제 부모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고, 놀고먹기에 바쁜 애들이 무슨 사회적 의식이 있을 리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관심이 없는 거지.”

하긴 그렇습니다. 어버이연합인가 뭔가 하는 희한한 단체의 유령 같은 노인네들이 반값등록금 투쟁에 반대해서 데모를 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하긴 노인네들도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든 두 배로 올리든 무슨 상관이겠어. 데모대에 가면 점심도 주고 용돈도 준다니 그게 더 좋을 테지.”

아무튼 저도 몇 년 후면 봉착할 문제인데,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학을 사그리 없애버리는 거죠. 그러면 사교육비 문제도 해결되고 비싼 대학등록금 문제도 일거에 해결될 거 아닙니까. 거기다 미스 리플리나 동안미녀 같은 위장취업 문제도 해결되죠.

뭐라고요? 어처구니없는 소리 그만 하고 자라고요? 알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새벽 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군요. 그렇지만 가끔 도무지 답이 없는 문제에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약이 될 때도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아니라면 할 수 없고요.

아, 그러고 보니 위장취업이 한때 사회운동, 민주화운동의 한 수단이기도 한 시대가 있었죠. 대학을 나온 것을 숨기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쩌다 시대가 변해 하나의 훈장으로 존중받던 위장취업이 비열한 사기꾼들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