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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내가 미스 리플리에 박수치며 응원하는 이유

<미스 리플리>. MBC가 내놓은 새 월화드라마다.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신분상승 욕구에 얽매인 한 여자의 거짓말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리플리 하면 당장 누가 떠오를까? 알랑 들롱. 미남자의 대명사. 어떤 잘 생긴 남자도 이 남자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태양은 가득히>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그의 눈빛은 심연 그 자체였다. 나는 오래전에 그 영화를 보았는데, 비열한 범죄자 미스터 리플리를 절대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단지 나에겐 리플리처럼 거짓말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

<태양은 가득히>는 1999년에 맷 데이먼이 주연한 <리플리>로 리메이크 됐지만, 이 영화는 보지 못했다. 알랑 들롱에 대한 향수가 너무 강해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리플리의 원조 <태양은 가득히>는 거의 열 번 정도 보았는데 줄거리와 영상을 머릿속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다.

▲ 미스 리플리 홈페이지 메인화면

오랫동안 블로그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실은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드라마도 한동안 보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 여자로 재탄생한 <미스 리플리> 1, 2편을 동시에 보게 된 것이다. 물론 한 편당 700원씩 주고 보는 것이지만, 드라마 시청 비용은 <다음>에서 지급받고 있는 셈이라 다행이다.

알랑 들롱, 맷 데이먼의 미스터 리플리에 이어 미스 리플리로 등장한 인물은 이다해다. 과연 이다해가 얼마나 리플리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매우 만족할 만해 보인다. 알랑 들롱이 보여준 정적인 울분과 욕망, 범죄행각에 비해 다소 격정적인 모습이 어수선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거짓말로 자신을 하나씩 포장해갈 때마다 보다 차분해지고 마침내 알랑 들롱이 그랬던 것처럼 정적인, 용의주도한 사람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결국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알랑 들롱의 리플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다해의 리플리에게서도 연민을 느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연민이 아니라 동지의식이다. 초라하고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이다해(장미리)를 나는 너무나 가슴 아프게 이해하는 것이다. 운명처럼 주어진 멍에를 벗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바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 장미리(이다해)는 졸업증명서 위조업체에 의뢰해 동경대 졸업증명서를 위조한다.

얼마 전, 한때 잘 나가던 큐레이터요 동국대 교수였던 신정아 씨의 학력위조 사건이 있었다. 세상이 그녀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사법당국이 그녀에게 유죄판결을 내려 감옥으로 보냈지만, 나는 그녀를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學力이 아니라 學歷이 우대받는 사회가 신정아를 리플리로 만든 것일 뿐 아닌가.

실제로 신정아가 별다른 學歷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훌륭한 큐레이터였음에는 틀림없었다는 점으로 보아 어떤 學歷者보다 높은 學力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대학을 나왔지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리플리의 초라한 현실은 리플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명도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이고 부조리이며 깨부수어야 할 세계다. 다만, 일개인일 뿐인 리플리는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포장하고 신분상승을 꾀함으로써 역시 부조리한 세계의 일원이 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뿐이다.

미스 리플리 이다해의 첫 번째 거짓말은 대학도 나오지 못한 그녀가 동경대 졸업생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거짓말 이후에는 보다 능숙하게 자신을 포장하거나 남을 속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언제쯤엔가는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도 분간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 장미리가 동경대 졸업생으로 학력을 위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경대 교정에서 동경대 유니폼을 입고 다닐 때의 장미리. 그녀도 남들처럼 얼마나 대학에 다니고 싶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이해하면서 이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그녀의 거짓말이 보다 능숙하고 보다 완벽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이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호텔A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호텔리어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면 정말이지 아주 통쾌할 것만 같다.

물론 언젠가 드라마가 끝날 즈음엔 그녀의 거짓말이 모두 들통이 나고, 그녀는 비난 속에 쫓겨나게 될 것이다. 신정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때 한 분야에서 최고라고 추켜세우던 사람들이 “쟤가 대학도 못나온 애였어? 기가 막히는군”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리플리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리플리들을 향해 마음속으로나마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리플리 증후군 환자다. 그러니까 내가 미스 리플리를 응원하는 이유는 바로 나도 그녀처럼 환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와 달리 나는 음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