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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짝패, 민중사극에서도 양반 아니면 주인공 못하나

사극이란 게 대체로 그렇습니다만, 일종의 운명론 같은 걸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인공들은 늘 양반이거나 양반이었거나 양반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입니다. 짝패도 예외는 아닙니다. 천둥이가 귀동이가 되고 귀동이가 천둥이가 되는 기막힌 운명이 드라마의 주소재이긴 합니다만, 결국 천둥이나 귀동이나 모두 양반의 핏줄을 타고났습니다.

비록 천한 여종 막순이의 아들로 태어나 귀동이의 운명을 가로챈, 원래는 천둥이였던 귀동이도 서울의 어느 명문가 대감의 씨앗인 것입니다. 원래는 귀동이였던 천둥이는 당연히 양반의 핏줄입니다. 그러니 이 드라마 짝패도 결국 양반이 주인공인 셈입니다.

글쎄 제가 지금껏 무수한 사극을 보아왔지만 순수한 상놈이 주인공 행세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짝패와 마찬가지로 민중사극을 표방했던 추노조차도 주인공은 양반이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상놈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천둥이는 상놈 중에 상놈, 거지굴 움막에 살지만 보통 천것들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며, 행동하는 것도 다릅니다. 거지이면서도 절대 체면을 구겨가며 빌어먹지 않습니다. 거지답지 않은 거지요, 천민답지 않은 천민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는 저로서는 실로 불편합니다. "아니, 거지놈 주제에 거지답게 놀아야지."

하하,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군요. "아니, 거지라고 사람 무시하는 거야? 거지면 꼭 거지처럼 굴어야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물론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지도 일종의 직업인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거지답게 굴어야하는 것은 기본 아닐까요? 이거 말이 좀 엇나가고 있군요.

아무튼, 천둥이가 어릴 적부터 남달리 대단한 인물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어 그러는 건 알겠지만, 제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거지로서 할 바를 충실히 하면서도 숨겨진 재능을 갈고 닦을 수는 없을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천둥이가 진짜 상것이면서 그런 출중한 재능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거지요.

글쎄요. 왜 드라마 작가들은 사극을 만들 때 주인공이 양반이거나 양반 출신이 아니면, 하다못해 반쪽이라도 양반의 피를 받은 자만이 주인공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요? 그 속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여기에도 일종의 운명론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양반(귀족)은 유전적으로 특별하다는….  

아니면, 온전한 상놈 출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놓으면 시청자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신분을 타고나거나 획득하지는 못하지만 동경 심리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런 심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까요?

성초시의 딸 동녀가 천둥이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바꾼다고? 누구나 양반이 되는 세상을 만든다고? 그럼 그건 양반이 없어진다는 얘기잖아. 그런 세상은 있을 수 없어. 네가 아무리 글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어. 근본은 변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동녀가 천둥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동녀는 근본이 다른 천둥이를 좋아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양반집 규수가 천민을 좋아한다는 것은 곧 체제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동녀가 말한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철학은 운명론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운명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그 시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오늘날 사람들인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한지가 오래인데도 아직까지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천둥이가 막순이가 거지굴 움막에서 낳은 진짜 천둥이이길 바랐지만, 결과는 김진사댁 귀동이 도령이 천둥이가 되고 마는 비극이 연출되고 말았습니다. 그 또한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고, 스토리의 중요한 골간이었겠지요.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합니다.

왜 우리나라 사극에서 상놈은 주인공이 되지 못할까? 임꺽정이나 장길산 같은 소설 속의 인물 말고 이 시대의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주인공으로서의 천민 말입니다. 추노에서도 보았지만 조선 후기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고 합니다. 사농공상을 뺀 노비가 말이죠.

흥선군 이하응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봐서 시대 배경이 대략 1850년대쯤 되는 거 같은데, 주인공은 성학집요니 통감이니 하는 걸 읽고 있는 걸 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 제가 이율곡 선생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성학집요가 율곡의 정치철학이 망라된 역작이란 것도 압니다.

그러나 시대는 유럽에선 이미  자본주의의 경전이라 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씌어진지가 오래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던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세계사적 조류와 동떨어져 "근본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는 운명론적 철학만 고집하고 있던 것이 조선이었습니다.

결국 천둥이가 품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도 '올바른 임금을 세워 모두가 양반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율곡이 선조(왕)를 계몽할 목적으로 저술했다는 성학집요를 그토록 열심히 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운명론의 귀결은 이런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훌륭한 임금을 모심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런 생각은 북한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주체사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절대적인 수령이 없이 세상을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떻든 그 모든 것이 천둥이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민중사극을 보면서도 양반을 주인공으로 모셔야 한다는 건 역시 좀…. 어쨌거나 천둥이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앞으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권문세족들과 짝패, 즉 천둥이와 귀동이 패거리의 한판 싸움이 볼만해질 듯합니다. 그 사이에 천둥이와 귀동이의 출생을 비밀을 둘러싼 갈등도 치열하겠지요. 

두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