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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욕망의 불꽃, 최악의 악녀 윤나영에 연민을 느끼는 이유

욕망의 불꽃의 주인공은 단연 신은경이죠. 유승호와 서우도 있지만, 아직 신은경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연륜이 있는데. 조민기 역시 발군의 연기자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데, 이 드라마에선 신은경을 빛나게 해주는 역에 머무르는 것 같네요. 뭐랄까, 신은경을 위한 배경이랄까요….

신은경, 아니 윤나영이라고 해야겠군요. 윤나영은 지독한 악녀지요. 세상에 저토록 사악한 여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에다 악녀라고 불리는 것조차도 그녀에겐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녀의 악행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우선 자기 언니를 강간하도록 강준구를 충동질한 악행이 있지요.

결국 강준구는 언니를 강간했고, 대서양그룹의 셋째 아들 김영민(조민기)과 혼담이 오가던 언니 윤정숙의 인생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강준구는 진심으로 윤정숙을 사랑했죠. 정숙을 보호하려던 강준구는 싸움에 휘말리며 살인죄를 저지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 윤나영. 목적을 위해선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윤나영의 음모가 발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영의 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으니 천륜을 저버린 것이었지요. 나중에 나영은 직접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목숨처럼 아끼는 아들 민재의 생모 양인숙을 자동차로 치어 죽인 것이지요.

물론 그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대서양가 근처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몰래 민재를 만나고 있지요. 당연 민재는 그녀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비극은 나영이 자기가 낳은 아이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낳자마자 죽었다는 소리에 안도하는 윤나영.

그녀라고 사람의 감정이 없지는 않겠죠. 죽었다고 하자 잠깐의 안도가 있은 뒤에 다시금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와 오열합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 저이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에겐 인간의 본성보다 악마적 본능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어제 그랬죠. 정숙이 고아원에서 데려다 길렀다는 혜진이가 자기 딸이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녀는 다시금 절망적인 상태에서 절규합니다. 그녀의 절규는 위기감과 낭패감 때문이었죠. 그러나 잠시 후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다시금 잠깐의 안도에 뒤이어 인간적 슬픔이 그녀를 지배하는 모습.

그러더니 언니에게 악을 쓰며 "네가 그럴 수 있느냐"며 책임을 따집니다. 아, 그녀는 딸이 살아있었으며 10여 년을 살다가 다시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그 상황에서도 모든 책임을 언니에게 떠넘기는 고도의 술수를 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그 술수는 자기 마음의 짐을 덜어보려는 뜻도 들어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나영은 정숙에게 선포합니다.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테야. 이걸로 우리는 끝이야. 앞으로 절대 찾아오지도 마." 그러나 정숙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혜진을 찾아 나영에게 돌려주고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지요. 아이를 찾아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마침내 정숙은 혜진이의 행방에 대해 실마리를 찾았나 봅니다. 나영의 저택 앞에 찾아간 정숙. 나영이 왜 찾아왔냐고 짜증을 내지만 혜진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며 희망에 찬 얼굴로 말하는데, 순간 나영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이렇게 소리치고야 마는군요. 

"아니 그 앨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토록 조심해왔던, 자신의 이중적 면모를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언니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순간적으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영의 언니는 천사네요. 순간적으로 나영의 속마음을 알아챘을 법한데도 모른 척 넘어갑니다. 

▲ 뉴욕의 밤거리에서 술에 취한 양인숙을 자동차로 치어 살해하는 윤나영


윤나영, 이렇듯 가면을 쓰고 20년 넘게 대서양가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더 외롭고 지친 영혼을 안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지요. 밤마다 알콜을 친구 삼아 낮의 고통을 위로하며 말입니다. 모두들 잠든 밤이 되면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으니 그때야말로 그녀에겐 가장 편한 순간이겠지요. 

어쩌다 자신의 이중성이 들통나는 순간이 생기면 당황하는 순간은 찰나, 어느 틈엔가 평정을 찾고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윤나영이었습니다. 그녀는 늘 현숙하고 친절하며 부지런하고 이해심 많은 대서양가의 며느리였습니다. 게다가 아무 욕심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맹탕'입니다. 

그러니 위의 동서들도 그녀를 경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변을 속이면서 나영은 하나하나 대서양을 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꿈은 부잣집 며느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꿈은 남편을 대서양그룹의 총수로 만들어 아들 민재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 끝없는 욕망을 위해 나영은 가면을 쓰고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잠든 밤이 되면 타는 목을 타고 넘는 술만이 그녀의 괴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그녀는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지독한 악녀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이해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의 불행을, 그녀의 아픔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보듬기 때문일까요? 그것 때문만일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을 수없이 저질렀음에도 쉽게 그녀를 비난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 무엇 때문일까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신은경이 윤나영의 이중적 면모를 유감없이 잘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신은경이 아니라면 누가 윤나영이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연기할 수 있었을까요?

▲ 가면의 두 얼굴, 윤나영


그러므로 윤나영이 저지른 숱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이해하고 보듬게 되는 것은 모두 신은경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이제 양인숙(엄수정)도 등장했고, 양인숙의 기둥서방이며 비열한 건달 송진호(박찬환)도 등장했으며, 나영의 첫사랑 박덕성도 나타났으니 윤나영의 번민은 더욱 깊어지겠군요.  

그러나 버스회사 사장 아들 박덕성을 만난 자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는 걸 보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네요. 오히려 박덕성의 존재에 대해 미리 알고 바로 위 동서 남애리(성현아)와의 관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 정말 섬뜩합니다.

아무튼 사상 최악의 악녀 윤나영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하며 그녀를 쉽사리 비난하지 못하고 도리어 측은지심을 발동시키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공신은 누가 뭐래도 신은경입니다. 그녀의 신들린 연기에 윤나영의 영혼까지 사로잡힌 듯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니, 앞길이 구만 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