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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추노' 너무 예쁜 이다해를 위한 변명

어떤 게 진짜일까?
"이다해, 차라리 화장을 벗어라" vs "거친 모습의 남자 배우들의 연기와 완벽한 앙상블"

<추노>에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독특하다 못해 희귀하다고 할 소재, 곽정환 감독이 만들어내는 빼어난 영상미, 어떻게 찾아다니며 찍었는지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촬영지, 탄탄한 주연배우들의 연기력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조연들의 열연, 회마다 등장하는 카메오들의 지나치게 눈부신 활약 등등등….


이다해, 노비들의 열전 '추노'에선 너무 예쁜 것도 죄가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원색 가득한 영상에 클로즈업되는 이다해의 아름다운 미모가 볼거리 중의 볼거리입니다. 나만 그런가? 흠흠~ 뭐 아무튼, 그러나 요즘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다해에 대한 비판이 드셉니다. 주로 이다해가 너무 예쁘다는 비판들입니다. 이걸 보면 어쨌든 이다해의 미모가 볼거리인 것만은 확실해보입니다. 눈에 안 보이면 비판도 없을 테니까요.  

비판들은 주로 이렇습니다. 주연배우로서 존재감이 미약한데다 다른 여종들에 비해 너무 깨끗하다든지, 도망치는 장면에서도 화장한 듯한 고운 얼굴이 거슬린다는 것이죠. 모두 일리 있는 비판들입니다. 그러나 존재감이 미약하다는 의견은 극의 중심이 남자들의 추격전이란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할 사정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런 비판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신에 너무 몰입하다보니 나온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다해도 함께 액션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면 더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최근 이다해는 강한 액션과 두 남자의 대결이 중심축인 '추노'에서 부드러운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표현, 거친 모습의 남자 배우들의 연기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광남일보> 기사에 더 호감이 가는 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다해의 차분하고 절제된 감정연기에 대한 칭찬보다는 거친 드라마의 격에 맞지 않게 너무 예쁘게 차리고 나온 데 대한 비판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뭐 아무튼(이건 <추노>에서 장혁이 잘 쓰는 대사죠? 이 대사가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 자주 쓸랍니다), 예쁘다는 비판을 많이 듣는 것도 실은 이다해로선 성공했다는 뜻이죠.

그래서 인터넷에선 어떤 비판과 어떤 칭찬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블로그에선 이보다 비판이 훨씬 거칠고 본격적입니다. "'추노' 이다해, 열연에도 불구 비판 받는 이유는? "언년이가 너무 예뻐!""처럼 차분한 진단과 비판도 있지만, 어떤 블로거는 아예 "이다해, 화장부터 벗어라!"는 제목으로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비판들의 핵심은 이다해가 리얼리티를 배반하고 너무 이미지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다해의 의상과 분장은 감독이 추구하는 영상철학의 일부

그러나 저는 역시 곽정환 감독이 추구하는 작품세계가 뛰어난 영상미를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또한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시청자들이 연출자의 의도나 기법을 이해하면서 드라마를 보아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 빼어난 영상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배우들에게 의상이나 분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클 것입니다. 

사진=바람흔적 김천령님의 블로그

아마 언년이 혹은 김혜원의 의상과 분장은 이다해의 뜻이 아니라 감독이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감독이 추구하는 영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창조한 것이 바로 대길 도령이 사랑했던 언년이요, 태하와 함께 쫓기는 김혜원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보면 대길 패거리와 태하의 복장 또한 너무 과장됐다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한파 속에 장혁과 오지호가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걱정되기까지 했습니다. 실제로 <추노>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촬영장면을 보면 그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장혁은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다 몇 번이고 말이 넘어져 떨어져 다치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장혁이 뒤에 김하은을 태우고 달리다 보니 말이 힘들어 넘어진 것 같습니다)  

<추노>가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출연자들이 직접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을 수도 없이 찍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보통 대역을 쓰거나 아니면 가짜 말을 쓰는 경우가 많았지요. 저는 <추노> 이전에 출연자들이 직접 말을 타고 생생하게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토록 리얼리티에 신경을 쓰는 <추노>가 하필 이다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뽀얀 피부와 화려한 의상으로 네티즌들의 원성을 샀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을 만든 곽정환 감독의 스타일과 관계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감독의 영상철학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거 말입니다. 4부에서 송태하와 김혜원이 달리던 도주로를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의 장면을 위해 동원된 수많은 절경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많은 네티즌들이 "아,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던가!" 하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도주로는 하나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블로거 <바람흔적 김천령>님(왼쪽 사진 참조)에 의하면, 김혜원과 송태하가 숨어들었던 암자는 전남 구례 지리산 사성암이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곳에서 우리는 괴짜 땡중 이대연을 만나는 기쁨까지 누렸었지요. 그런데 이 암자를 향해 쫓아오는 대길 패거리가 달리는 길은 지리산이 아니었습니다. 전남 해남의 달마산이었던 것입니다.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명산입니다. 김혜원과 송태하가 도주하던 산도 달마산이었지만, 어느 틈엔가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석문 위를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이 한 순간의 추격전은 전남 해남 달마산에서 시작하여 구례 지리산 사성암을 거쳐 충북 단양팔경으로 내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길 패거리가 말을 타고 추격하던 어딘지 모를 광활한 들판을 지나 송태하와 김혜원이 탄 배와 마주쳤던 곳은 경북 안동 부용대였습니다. 부용대는 불과 몇 달 전에 낙동강 도보여행을 하면서 지나왔던 터라 안면이 많은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전남 화순 운주사 등 몇 개의 장소가 더 이 추격전을 위해 동원 됐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의 추격전을 찍기 위해 왜 이토록 많은 장소가 동원 됐을까요? 모두가 아름다운 영상을 위해서지요. 덕분에 우리는 눈이 즐거운 것이고요. 이 아름다운 영상으로 만들어진 배경 위에 그려지는 이대길과 송태하, 이다해는 어떤 모습이 가장 좋을까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보았던 모습들이 이 아름다운 영상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리얼리티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대길과 언년이 그리고 태하와 혜원의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의상과 분장이라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영상미에 걸맞는 김혜원의 모습이란 지금 보고 있는 이다해라고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

초라한 행색의 이다해였어야만 리얼리티가 살아났을까

만약 이다해를 초라한 행색으로 만들어놓았다면 6부에서 피 묻은 치마에 붉은 매화나무를 그리는 태하의 묘기는 나올 수도 없었겠지요. 또한, 이다해의 얼굴에 숯검댕이를 바르고 낡은 옷을 입힌다고 해서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의 발상을 통해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지요. 

김혜원은 원래 양반이 아니라 여종 언년이였습니다. 그녀의 오라비 큰놈이가 대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 후에 큰돈을 모아 양반을 샀던 것이지요. 비록 김혜원은 현재 양반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노비라는 신분적 콤플렉스가 늘 가슴속에 불안하게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송태하와 도망치던 김혜원이 어느 농가의 헛간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함께 다니면서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혜원이에요. 김혜원." 송태하가 기쁜 표정으로 얼른 자기 이름을 말하려고 하자 혜원은 제지하면서 은인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송태하가 숨어있던 절을 떠나면서 스님(땡중 이대연)을 통해 이름을 알려주었던 거지요.  

만약 같이 허름한 복장이었다면 이 사진이 어울렸을까 ?

그러자 송태하는 자기 외가도 김씨이며, 훈련원에서 함께 있던 누구누구도 김씨이고, 친구 중에도 김씨가 아주 많다는 등 족보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습니까? 그때 김혜원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매우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요. 그리고 끝내는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하는 식의 짜증 섞인 말투로 태하의 말을 자르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때 저는 깨달았답니다. '아, 김혜원은 아직도 언년이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대로 가지고 있구나. 돈으로 양반을 사서 비록 신분상승을 했을지라도 늘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이 노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구나.' 그래서 저는 비로소 이다해의 너무나 깨끗하고 화려하기까지 한 의상과 분장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다해의 단정한 용모 속엔 
      신분적 콤플렉스도 들어 있어

김혜원의 너무 지나치리만치 단정한 용모는 바로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년이의 비극적 사랑은 오로지 그녀의 노비라는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큰놈이가 대길의 집에 불을 지르고 일가족을 죽여 멸문의 화를 입힌 것도 모두 노비라는 신분 때문이었죠. 만약 그녀가 노비가 아니었다면 그처럼 비극적 사랑은 없었을 것입니다.  

돈으로 신분을 샀다는 콤플렉스에 더해 이런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각은 가면 속에 자신을 깊숙이 숨기고 싶은 본능을 더욱 자극했을 것입니다. 만약 김혜원의 용모를 여느 여종처럼 만들어놓았다면 이런 김혜원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기란 매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는 화사한 혜원의 모습으로 노비였던 그녀가 지금은 노비가 아닌 양반임을 손쉽게 알 수 있는 편리함도 얻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오히려 '너무 예쁜 이다해'야말로 가장 적절한 리얼리티를 구사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괴변이라고 욕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너무 예쁜 이다해'가 더 좋아서 이런 소리 하는 거니까요. 하하~ 뭐 아무튼, 오늘 이다해를 위한 변명이 제대로 된 변명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역시 이다해는 다 떨어진 낡은 옷에 숯검댕이를 바르고 나왔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이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카드는 고인이 되신 코미디언 이주일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이걸 바꾸어서 이렇게 해보죠.

"너무 예뻐서 죄송합니다."  

ps; 그리고 여종 언년이가 너무 뽀얗고 예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인데요.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년이는 이대길의 추억속에서 등장하지 않습니까? 이대길은 어떤 언년이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예쁘고 뽀얀 언년이를 기억하고 있겠죠. 신분의 벽까지 넘어 사랑했던 언년이가 숯검댕이를 덕지덕지 얼굴에 바른 그런 추한 모습으로 기억되진 않으리라고 보는 거지요.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그 기억이란 거의 환상적이죠. 마치 꿈나라처럼…. 대길의 추억속에 등장하는 언년이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예쁜 언년이가 아니었다면 그거야말로 반리얼리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다해 대변인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좀 알아줄라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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