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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기획의도로 살펴보는 '추노'의 등장배경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사극은 대부분 지배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를 열광시켰던 <선덕여왕>도 결국은 지배자들의 이야기였지요. 그러나 <추노>는 다릅니다. <추노>는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노비들에 대한 이야깁니다. 양반의 나라 조선에서 노비는 인간이 아닌 품목으로 분류되는 물건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노비의 숫자가 급증하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드라마 <추노>에서는 그 시기를 임진왜란 이후 인조시대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조금 다를 수가 있습니다. 노비의 수가 급격하게 불어나는 시기가 임진왜란 전후보다도 조선시대의 부흥기인 숙종~영조시대에 더했다는 주장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기가 조선에서의 르네상스라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 신분질서의 붕괴를 촉진하고 부익부 빈익빈이 사회의 새로운 현상으로 대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일면 수긍이 가는 점이 있습니다. 대규모의 거상들이 출현하고 부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그 반대편에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빈농들이 소작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연구결과가 별로 없으니 실태를 안다는 것이 어려울 뿐입니다.  대개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는 주로 왕조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료가 왕조에 몰려있기 때문이란 한계점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도 '태정태세문단세'를 외는 식이었지요. 

<추노>는 조선 인조시대 당시 노비의 수가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의 인구가 왕족과 양반, 평민들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날의 인구구성으로 보자면 왕족과 양반은 상류계급이요, 평민은 중산층과 비교할 수 있다면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노비들은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추노> 홈페이지 기획의도를 살펴보면 여기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물론, 세상에 정답이란 없습니다. 답이란 저마다의 사람들에게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노> 제작진은 기획의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 지금 우리는 '도망노비'를 말하려는가?" 

우리는 천성일 작가의 말을 통해 그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희망은 작고 부질없지만, 그것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작가는 추노를 통해 바로 오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약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각자의 얼굴을 저 안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가 저잣거리를 살아가는 그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화폐가치가 인생의 값어치로 손쉽게 매겨지고
'88만원 세대'라던가,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문구들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하는 현재의 모순
그 시대와 등가로 놓을 순 없다하더라도
맨몸으로 부딪혀 싸우지 않고서는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만큼은 여전하기 때문인지도.

드라마 기획의도는 계속 말합니다.

이런 세상의 모순이 극에 달했던 때가
드라마 <추노>(推奴)가 그리려는 시대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던 '절반 이상'의 사람들 중에는
한 때 노비였지만 도망쳐 인간답게 살려는 이가 있고
지옥 같은 저잣거리에서 스스로의 인간됨을 지키기 위해
노비들을 잡아들이며 맨몸으로 분투하는 이가 있고
노비로 전락해서도 세상을 향한 인간으로서의 소명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절박한 입장이 서로의 목을 겨누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곤 했었을 터이다.
그 사연 위에 드라마 <추노>의 이야기는 씌어진다.


그래서 <추노>에서 블로거 자이미님의 말처럼 누구보다 <추노속 양반사냥꾼 업복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업복이(공형진 역)는 '마누라 속곳 벗기는 것보다 쉽게' 호랑이를 사냥한다는 관동 포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대의 빚으로 인해 노비로 팔렸지만, 머슴질 수삼 년에 견디지 못하고 탈출했다가 추노꾼 대길에게 잡혀 왼쪽 뺨에 노비 문신이 새겨집니다. 

그리고 원한에 사무친 그는 마침내 '양반을 모두 죽여 상놈의 세상을 만든다'는 당에 입당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혁명당원이 된 셈입니다. 업복이는 <추노>에서 그저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닙니다. 이대길, 송태하, 황철웅, 김혜원(언년이)과 더불어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지요.   

예정된 대로(!), 업복이는 결국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진즉에 "칼 든 자들보다 붓 든 자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블로거 자이님'의 우려처럼 <추노>는 "단순히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한 기획의 산물"이거나, "진정한 사회적 변혁을 꿈꾸는 급진적 드라마"이든지 아니면 역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의 잔혹함을 보여줌으로써 결코 변할 수 없는 사회의 공고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튼 <추노>는 이전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송태하와 업복이가 벌이는 서로 다른 의미의 투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많을 것입니다. 노비를 쫓는 현금사냥꾼 추노 대길이 이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도 주목되는 관전 포인틉니다.



<추노>의 기획의도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과 몇 백 년 전, 화폐가치로 계산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반과 평민을 다 합한 숫자보다도 많았던 이들은 바로 노비들입니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었던 이들에게는 희망이나 꿈, 전망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고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습니다. 이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뿐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픽션이
지금 이 시대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을 바라보게 만든다면,
다른 시대를 다룬 픽션은 필연적으로,
지금 이 시대 그 자체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다.



<추노> 기획의도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입니다. <추노>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곽정환 감독이 <한성별곡>에서 보여주었다는 치열한 문제의식이 다시 한 번 기대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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