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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새해벽두부터 거실에 들어온 쥐와 한판 벌이다

작년 말, 그러니까 정확하게 날짜는 기억 못하겠지만 대충 12월 중순경 불청객이 우리집에 찾아들었습니다. 쥐가 나타난 것입니다. 아이들 엄마가 부엌에서 지나가는 쥐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습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쥐는 보통쥐보다 엄청 큰 쥐였습니다. 팔뚝을 내보이며 시커먼 것이 휙 하고 지나갔다고 말할 땐 저도 소름이 확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 쥐를 엄청 무서워합니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막내둥이라 험한 일 안 하고 귀엽게만 자라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형들이 똥장군을 짊어지고 낑낑 거릴 때도 저는 마당 한 귀퉁이의 바위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쐬며 재미있게 그 장면을 구경하곤 했었습니다. 저는 촌에서 남들 다 지는 지게도 한 번 지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늘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지만, 저는 한 번도 고무신을 신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소원이 검정고무신 하나 가지는 거였을까요? 아무튼 늦게 얻은 아들이라 그랬던지, 막내라고 그랬던지, 편애를 많이 받은 편입니다. 물론, 그 편애도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이 무너지면서(몰락이라고 해야 되나?) 끝났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 형들은 쥐 같은 걸 무서워하기는커녕 보는 족족 잡아버리는데(아마 쥐 꼬리도 만질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보기만 해도 자지러질 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보다 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 엄맙니다. 우리 아이들 엄마는 이 지역에서도 인정해주는 꽤 담대한 여성입니다. 

과거에 학생운동도 했고 소위 위장취업이란 것도 했었던 사람이죠. 공장에 들어가서 노조위원장까지 했는데 회사간부든 경찰이든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던 이 아줌마에게도 치명적인 적수가 있었답니다. 바로 쥐였지요. 파업농성을 하는 중에 그렇게 당차던 이 아줌마(당시는 아줌마가 아니었지만)가 쥐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꼼짝을 못했다는 겁니다. 

오들오들 떨며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엄마를 보고선 동료 노조원들이 기가 차서 웃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간이 큰 줄 알았더니 이렇게 겁이 많을 줄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당시 아이들 엄마의 동지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들으며 저도 웃었지만 속으로는 찔끔 했었지요. 저도 만만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세월은 흘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저는 예의 그 비명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비명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세상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하는 착각에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그때는 한참 『보석비빔밥』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집 식구들이 모두 연속극 메니아라는 점은 제 포스트를 자주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한참 TV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으아아아아아~~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아이들 엄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얼굴엔 정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도 벌떡 일어나 "왜, 왜, 무슨 일이야?" 하면서 두리번 거렸고, 딸애도 놀라 제 엄마 옆으로 달려가 팔을 붙들고 섰겠지요.

"쥐, 쥐다, 시커먼게 커다란 쥐가 부엌으로 들어가려고 문틈을 비비다가 내가 보니까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그 무서운 쥐가 결국 다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작년 말 잠깐 집에 들렀을 때 쥐가 나타났다고 했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아이들 엄마만 보았었기에 대충 청소를 한 다음 애써 쥐란 놈은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쥐가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아이들 엄마 뿐만 아니라 딸애도 보고 저도 보고 말았습니다. 아들 녀석은 자기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 소란에도 꿈쩍도 하지 않더군요. 이젠 상스런 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 집에서 유일하게 건장한 성인 남자인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아, 어쩌다가 오랜만에 신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집에 왔더니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절대 무섭다거나 징그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내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얼른 아이들 엄마에게 딸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아이들 엄마는 "연속극 봐야 되는데, 아 정말~" 하면서도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습니다.

저는 우선 맨발이었으므로 신발장에서 등산화를 꺼내 신었습니다. 유사시에 쥐와 저의 맨발이 접촉하는 불상사를 차단하기 위해섭니다. 그리고 급할 땐 등산화의 강력한 전투력으로 쥐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 방문을 모두 닫고 주방문도 닫았습니다. 이제 거실엔 쥐와 저, 이렇게 둘만이 남은 것입니다.

우선 떨리는 가슴으로 TV 진열대와 소파 진열장 등을 벽으로부터 이격시켜 거실 가운데로 몰았습니다. 그 전에 거실 바닥에 있던 모든 잡다한 물건들은 소파 위로 던져놓아 바닥은 깨끗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대로 쥐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얼른 마당에 나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왔습니다. 마당에서 쓰는 철제 쓰레받기에 쥐가 한 방 맞으면 바로 뻗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리고 서서히 쥐 잡기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순간 제 이름값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우선 소파를 45도 각도로 들어올려보니 거기에 쥐는 없었습니다. 소파를 들어올리는 거, 그거 보통 일 아닙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거대한 가죽소파를 45도로 세우는 일이 보통일인가. 그리고 다음 목표는 TV 진열대 밑입니다.

진열대의 바닥은 뒷쪽만 살짝 개방된 3면이 막힌 형상이었습니다. 바닥 공간의 높이는 약 10센치쯤? 철제 쓰레받기를 집어넣어 막 휘저었습니다. "아 제발 이놈아, 여기에 맞아 좀 죽어다오." 우당탕탕~ 그러나 찍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 이런, 여기도 없나? 그런데 잠시 후 뭔가 시커먼 놈이 비칠거리며 밖으로 기어나오는 게 보였습니다. 쥐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이놈이 쓰레받기에 맞아 힘을 잃었던지 그렇게 빠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간 저는 온몸이 감전된 듯한 충격에 손발이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쥐도 무척 겁을 먹은 듯 벌벌 기며 제 발 옆으로 지나 소파쪽으로 도망갔는데, 마음속으로는 강력한 등산화의 전투력을 날려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지나고 나니 허탈했습니다. 한방에 날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아,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고 했지. 차라리 도망갈 길을 터주고 잡는 게 낫겠다. 만약 쥐를 잡아 죽인다고 하더라도 시체 처리가 또 문제 아닌가 말이야." 그래서 얼른 현관문을 열고 다시 소파를 들어올렸습니다. 그러나 쥐는 다시 날랜 동작으로 후다닥 사라졌습니다. 

이번엔 어디로 도망갔는지 위치추적에 실패했는지라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TV 진열대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검색을 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진열대, 소파,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진열장입니다. 진열장은 현관문에서 가깝습니다. 진열장의 바닥을 보니 TV 진열대처럼 3면은 막혀있고 한 면만 터진 구조입니다. 놈은 이 안에서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있을 것입니다. 

우선 진열장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물건 옮기고 쥐 잡고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진열장을 혼자서 옮길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진열장을 기울여 약간 옆으로 옮겼습니다. 어? 그런데 이놈이 어디갔을까? 쥐가 안 보였습니다. 이거 낭팹니다. 쥐를 찾지 못하면 밤에 잠자긴 글렀습니다. 다시 조금 더 옮겼습니다. 그래도 없습니다. 

에이 안 되겠다, 처음 TV 진열대 밑을 쑤시던 방식으로 쓰레받기를 진열장 밑에 집어넣어 마구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순 제 몸에 찌리릿 하는 전기가 들어오면서 쥐가 나타났고 급히 현관문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저도 쥐를 쫓아 후다닥 뛰었고 도망가는 쥐를 향해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던졌습니다.       

계단을 비칠거리며 뛰어내려간 쥐는 얼른 마당을 지나 화단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동작이 얼마나 느렸던지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뛰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쓰레받기 공격에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거나 겁에 질려 근육이 마비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어쨌든 쥐는 다행히도 무사히 도망갔고 우리집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만약 쥐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면 그 다음 처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을 것이지만,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은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참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개선장군처럼 아이들 엄마와 딸아이가 숨어있는 방문을 열며 말했지요. "다 끝났다. 어서 나와라. 쥐는 쫓아냈다.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럼 시체 치우기도 귀찮고 그래서 그냥 쫓았다."

"아~ 씨~ 연속극 다 끝났네." 그러고 보니 계속 돌아가고 있던 TV 화면에서는 『보석비빔밥』이 끝나고 있었습니다. 연속극이 끝나면 올라가는(내려오는 거였던가?) 자막이 나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딸아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제게 "보석비빔밥 보게 해줘" 그러고 말입니다. 내 참~

어쨌거나 쥐 한 마리 덕분에 집은 깨끗해졌습니다. 거실 청소도 대대적으로 했을 뿐 아니라 주방도 깨끗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지은 지가 20년이 된 꽤 오래된 집입니다. 사실 20년이면 오래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나라에선 매우 오래 된 집이죠. 지하 1층에 지상 2층인데 지하에는 겁이 나 내려가지도 못합니다.
 
예전엔 이 지하(반지하)에도 학생들이 세를 살았었는데, 지금은 빈 방들에 거미줄만 무성합니다. 우리 동네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어 무슨 재건축조합 승인이 났다고 펼침막이 크게 붙었던데, 반대하기도 그렇고 찬성하기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집 상태로 보면 재개발 안 하고선 사람 살기가 고통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 집 같은 별로 오래 안 된, 이 동네에선 그래도 꽤 괜찮아 보이는 양옥집도 이 모양인데 골목 안 깊숙이 들어가면 오죽할까 싶습니다. 문제는 세입자들이겠지요. 하여간 신년 벽두부터 난리 한 번 쳤습니다. 그런데 한 편 그놈의 쥐새끼 한 마리 덕에 난리는 쳤어도 집은 깨끗해진 게 아닌가 생각되어 흐뭇하기도 합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니 아들 녀석이 눈을 비비며 나오는군요. "너는 마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냐?" "아, 너무 피곤해서. 어젯밤 늦게 자서 잠이 와 죽겠는데, 엄마가 성당 데려간다고 9시 반에 나갔잖아. 그래서 그랬지. 왜, 무슨 일이 있었나?" 하긴 뭐 제까짓 녀석이 나와서 뭘 하겠습니까? 

아이고, 약속시간이 다 돼 가네요. 쓰다 보니 앞뒤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저는 이만 나가봐야 되겠습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모두들 집집마다 쥐덫이라도 놓으세요. 요즘은 '쥐본드'라고 편리한 제품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두 개에 천 원이랍니다.
ps; 아, 그리고 상으로 막걸리 한 병 제 돈으로 사 마시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평소에는 또 술이야? 하고 인상을 쓰지만 이날은 그래도 안 쓰더구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