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이 변했습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이긴 하죠. 그러나 그 변화의 정도가 너무나 급격해서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비담은 <선덕여왕>이 한창 인기를 끌던 중반 등장하던 순간부터 관심을 한 몸에 모았습니다. 비담이란 이름이 선덕여왕 치세에 상대등을 지냈을 뿐 아니라 막판에는 반란을 일으켜 선덕여왕의 죽음에도 일정하게 관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궁지에 몰린 김유신이 연을 날리는 전술로 비담군을 격파했다는 월성전투는 너무나 유명하죠.


비담은 실제와 허구를 합성한 캐릭터

<선덕여왕>의 비담이 실존인물 비담과는 다르다는 주장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덕여왕>은 1부를 시작하며 자막으로 ‘시간과 공간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될 것’이라고 양해를 구해 상당부분 실제와 허구가 버무려졌음을 밝혔습니다. 특히 비담은 실존인물 비담과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에서 난 비형이란 설화 속 인물을 합성한 캐릭터입니다. 그러므로 비담이야말로 <선덕여왕>에서 가장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인물인 셈이죠. 그러나 어떻든 <선덕여왕>에서 비담은 미실의 아들.

그런데 비담의 변화도 매우 놀라운 것이지만, 덕만의 변화는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왕이 된 덕만은 비담에게 정보사찰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미실도 하지 않던 일입니다. 비담이 맡은 역할은 아마도 오늘날의 중앙정보부장이나 안기부장쯤 되겠지요. 선덕여왕이 왜 비담에게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겼는지 아직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왜 선덕여왕이 미실도 만들지 않았던 비밀정보기관을 만들었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심오한 의도는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는 의문입니다.

아무튼 비담은 날개를 달았습니다. 비담은 염종이 갖고 있던 ‘문노의 비밀정보망’을 모두 손에 넣고 최대한 활용하고 있습니다. 문노가 유신에게 전하고자 했던 ‘삼한지세’도 비담의 손에 있겠지요. 물론 이 삼한지세는 춘추의 머릿속에도 새겨져있긴 합니다만. 이제 비담은 명실상부하게 신국의 2인자가 되었습니다. 유신이 비록 상장군이 되어 전장을 누빈 공로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다고는 하지만 왕을 제외한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사량부령의 권력에는 미칠 바가 아닙니다.

선덕여왕이 비담을 비밀정보부장에 앉힌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막강한 권력에 더해 문노의 비밀조직에다 구세력의 핵심인 설원까지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비담이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비담의 싸늘한 표정에선 무언가 위험한 미래가 감지됩니다. 마치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에 나오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아나킨은 장래가 촉망되던 제다이였지만, 마음속에 숨어있는 두려움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그 두려움이 언젠가 분노로 변할 것임을 제다이들의 스승 요다는 알고 있었지요.

분노가 가져올 욕망과 파괴를 알고 있었던 요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나킨을 오비완의 제자로 만든 콰이곤은 아나킨의 능력만을 보았습니다.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비담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분노와 욕망을 보지 못하고 겉에 드러난 능력만을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겨눌 칼을 스스로 벼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아무런 느낌도 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비담의 분노, 비담의 욕망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비담에게 분노와 욕망의 마음을 불어넣어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미실입니다.

미실이 비담을 버렸을 때, 비담은 욕망덩어리였습니다. 비담은 탄생 자체부터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미실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태어난 비담은 그 꿈이 좌절되자 버려졌습니다. 비담의 두려움과 분노는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미실에게 버려진 비담을 데려다 키운 것은 문노였습니다. 그러나 문노 역시 비담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사랑과 배려를 나누어주기보다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어린 비담을 다그치기만 했습니다.

욕망의 근원은 두려움으로부터 솟아나는 분노

비담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싹트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삼한지세를 되찾기 위해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수십 명을 모조리 독살한 것도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어린 비담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결국 분노로 화했습니다. 영특한 미실은 비담의 마음속에 든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곧 분노로, 다시 매우 파괴적인 욕망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담의 뛰어난 재능이 분노가 가야할 길을 잘 안내할 것이란 점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대비하여 마지막 안배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미실이 난을 일으키기 전, 설원에게 붉은색으로 포장된 서첩을 가져오라 했을 때 모두들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공개된 후에도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서첩의 내용은 진흥왕이 설원에게 미실을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서첩이 우여곡절을 거쳐 비담의 손으로 들어가고 미실이 “결국 제 주인을 찾아가갔구나!” 하고 말했을 때, 도대체 그 숨은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대충이나마 그 뜻을 짐작합니다. 붉은 서첩은 미실이 비담에게 전하고자 했던 유산이었던 것입니다. 미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주는 사랑의 증표라고나 할까요. 미실은 끝까지 모자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이 서첩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이 서첩은 미실이 비담에게 남긴 유산이자 유언인 셈입니다. 그럼 미실은 무엇 때문에 붉은 서첩을 비담에게 남기려고 했을까요?

미실이 비담에게 남긴 유산, 분노와 욕망

미실은 비담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와 욕망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담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담에게 남긴 미실의 붉은 서첩은 유산이 곧 유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비담의 변한 모습에서 살아남은 미실 잔당들은 살아있는 미실을 보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설원을 비롯한 이들은 새로운 기대로 꿈에 부풉니다.


‘연정이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다!’란 가르침을 주고 떠난 미실의 유지를 받은 비담과 ‘아낌없이 모든 것을 덕만에게 바치겠다!’는 유신의 한판 대결은 불가피한 숙명입니다. 이 두 사람의 가운데에서 선덕여왕이 어떤 태도를 보일까 하는 것도 주목되는 관전 포인틉니다. 그러나 어떻든 선덕여왕이 된 덕만이 보여주는 모습은 현재로선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독재자 미실에 대항하던 덕만이 갑자기 더한 독재자가 된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하긴 그것도 다 스토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장치라고 이해하면 그만이겠지요. 유신과 비담의 마지막 대결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미실에 맞서 싸우던 덕만을 응원하던 저로서는 매우 불만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덕만이 미실도 하지 않았던 비밀정보기관을 만들 수 있을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조작사건 같은 걸 만들어내는 비담을 용인할 수 있을까?

아무튼 ‘고참이 반합에 똥을 누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했으니 지켜볼 일입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