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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야기

여성해방운동가 고 이경숙선생 회갑연에 다녀와서

오늘 어떤 분의 회갑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은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답니다. 오늘 회갑연의 주인은 이미 5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기이한 회갑연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이 잔치의 주인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세상을 하직하고서도 남은 사람들에게 모여 떡과 고기를 나누게 하는 그 뜻이 실로 갸륵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잔치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고 경숙 선생입니다.

 

 이경숙 선생은 5년 전 갑작스런 급성심부전증 발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야말로 느닷없는 그이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청천벽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당시에 많은 이들이 실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경숙 선생에 대하여 특별히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이를 사모하고 존경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수많은 계절이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잊지 않고 모여 함께 떡과 고기를 나누며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른 이들처럼 이경숙 선생과 함께 어떤 사업을 해보거나 활동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이의 평소 신념이나 지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이의 온화한 모습에서 늘 위안을 받고 생기를 얻었던 기억으로부터 어떤 신조나 논리보다도 강렬한 선생의 삶을 느낍니다.

 

그이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오로지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선 봉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은 고결한 수녀가 걸어가는 길과는 또 다른 길이었습니다. 가톨릭 신도이기도 했던 그이는 신에게 봉사하는 대신에 가난하고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결실 중에 하나가 오늘날 마창여성노동자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남여성회도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떡과 고기를 나누는 기쁨을 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결실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이와 처음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양곡에 있는 그이의 아파트였습니다. 거의 이십 년 전쯤에 저는 수배된 오갈 데 없는 노동자였습니다. 게다가 나이도 무척 어리거나 젊었습니다. 아마 스물 다섯이나 여섯쯤 되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수배되거나 해고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사람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어느 사업장에 누군가가 해고 또는 수배되었다고 하면 , 거기도 드디어 배자가 하나 떴군!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참 어리거나 젊거나 혹은 여리디 여린 제게는 무서운 일이었지요.

 

당시엔 수배자는 배자, 해고자는 고자라는 은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산과 창원의 배자와 고자들은 주마다 한 번씩 모여 회합을 가졌는데 삼겹살 파티를 하기도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그게 WTO가 됐다가 요즘은 한미FT에다 미국산 쇠고기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원흉쯤 되겠는데, 모두들 잊어버린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지요.)에 대해 토론회를 벌이기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때 그 장소로 이경숙 선생의 아파트가 가끔 이용되었습니다. 따사로운 봄날 4층인지 5층인지 아파트 거실 전축 턴테이블에 올려진 양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흠뻑 빠졌던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물론 대부분은 저 같은 센치맨과 달라서 빨리 판 갈라고 성화를 부렸지만 말입니다
 

 
그이가 경남여성회 회장으로 계실 때, 저는 마침 남산복지회관(경남여성회) 인근에 살고 있었으며 제 아내가 사무국장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자주 갔었는데 갈 때마다 따뜻한 커피(원두로 만든)를 내주며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이거 굉장히 맛있는 거야. 어서 먹어봐! 하는 식이었지요.  

 

그이는 제 아들녀석 생일도 잊지 않고 챙겨주시던 자상한 분이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가끔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는데, 도민사격장 인근의 두부요리집은 요즘도 장사가 잘 되는지 어쩌다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이의 무덤에 새겨진 것처럼 여성해방운동가이기도 하고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던 삶의 치열함이 언제나 그렇게 온화하고 다정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모습만이 지금 눈에 선합니다.

 

그이의 업적에 대하여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삶을, 가족과 행복하게 보내어야 할 일생의 모든 시간들을 여성노동자들과 부조리한 세상을 혁파하는 일에 바친 그 삶이 이미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그이와 가졌던 다정하고 즐거웠던 그래서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해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벌써 이경숙 선생의 회갑이었군요. 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저렇게 즐겁게 모여 담소하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보니 그이도 틀림없이 하늘나라에서 기뻐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 가을, 가족과 함께 그이의 무덤에 다녀오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선생님은 가시고 나서도 좋은 일만하시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묻혀계신데다가 바로 앞에는 국민관광지 통도사까지 있으니… 선생님을 뵙고 나서 관광 삼아 통도사 구경하면 딱 좋겠구먼….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의 기일에 찾았던 통도사를 가득 메운 붉은 소나무들의 키가 유난히 훌쩍 크고 우람했습니다.        파비

 

이경숙 선생 약력   ▷ 충남 공주군 정안면 북계리에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 (1949년 음력 2월 26일생)
                            ▷ 마산가톨릭여성회관 및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근무 (1981년~1991년)
                            ▷ 마산창원 여성노동자회 초대, 2대 회장 역임(1992년~1996년)
                            ▷ 경남여성회 회장 역임(2000년~2002년)
                            ▷ 경상남도의회 의원(2002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 경남도의회 교육사회위원/농수산위원/여성특위 위원장 역임
                            ▷ 과로로 인한 급성심부전증으로 사망 (2004년 9월 3일)
                            ▷ 공주여고/서울여대/경남대 행정대학원 졸업
                            ▷ 경남도민일보 이사/ 경남시민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마창진 참여자치연대 공동대표/
                                경남
여성회 회장/ 마창여성노동자회 회장/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 노동사회교육원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