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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구비구비 문경새재를 넘다

문경 새제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

 

진도아리랑의 첫 구절은 이렇게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나는 문경새재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어제 바로 그 문경새재에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이 봄방학이라 2박3일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을 세우다 문경새재를 선택한 것입니다. 

조령1관문 주흘관.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중3때 봄소풍 이후 처음 온다. 그때가 1979년이니 딱 30년 만이다.

우리딸, 잠이 덜 깼다.

새재란 이름은 ‘새도 날아 넘기 힘들만큼 험한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억새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새재의 동북쪽에 하늘재(계립령)와 서남쪽에 이우릿재(이화령)가 있는데, 그 사이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고갯길은 하늘재입니다. 신라 아달라왕 때인 서기 156년에 뚫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실로 오랩니다.


이는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던 신라가 그 세력을 북방으로 팽창하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남쪽으로 세력을 펼치고자 했던 고구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 길은 대단히 중요한 요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삼국시대 내내 치열한 싸움터였습니다. 문경지역에는 새재와 하늘재를 비롯하여 대략 15개 정도의 고갯길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북쪽에 벌재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이 벌재를 넘으면 단양이 나오고 단양에는 유명한 온달산성이 있습니다. 온달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평강공주가 직접 내려와 장례를 치렀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 일대는 고대로부터 중요한 군사전략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거대한 백두대간은 신라에게 천혜의 방어막을 제공해주었지만, 거꾸로 북방진출에도 커다란 장애를 동시에 주었을 것입니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이곳은 무수한 싸움의 중심이었고, 가장 최근 6·25 때는 국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1관문을 지나 본격적인 새재 산행.

1관문 너머에 마련된 태조왕건 세트장에서 잠시 재미난 휴식.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개는 싸움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재 또는 령(嶺)이라고도 불리는 고개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고개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곳입니다.


벌재 북쪽은 단양군 적성면이고 남쪽은 문경 동로면 적성리입니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적성이란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경북 청도군과 경남 밀양시 청도면이 운문산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청도란 이름을 공유하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문경읍 관음리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미륵사라는 큰 절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고개의 남쪽 관음리 마을엔 관음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 미륵사와 관음사, 여기에도 묘한 ‘연결’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천년사직이 무너짐에 슬퍼하여 동생과 함께 금강산으로 가다 이곳에 이르러 미륵사를 짓고 머물렀습니다. 동생인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에 들었는데, 미륵사의 미륵불은 일반적으로 불상들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 달리 북쪽을 보고 서있습니다.


그것은 덕주공주의 상인 덕주사 마애불을 쳐다보기 위해서라하는데, 비록 지어낸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망국의 한이 서린 남매의 정이 남달랐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북쪽을 바라보며 월악산 자락에 외롭게 버티고 선 미륵불이 처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용추계곡. 이 바위는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궁예가 최후를 맞은 장소다.

흘러가는 물이 푸른빛으로 빛난다. 색깔을 보니 이미 봄이 왔나보다.

 

하늘재는 고려시대에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교통로로 더욱 발전하지만, 조선 태종이 새재를 새로 개척하면서 그 기능을 다하게 됩니다. 조선은 한양을 중심으로 X자형으로 간선도로를 건설했는데 북로, 서로, 삼남로, 남로가 그것입니다.


그 중 남로는 한양과 동래를 잇는 간선도로로써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서로와 함께 가장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이 남로는 영남대로라고도 불리는데 이곳 새재가 가장 험준합니다. 특히 새재를 넘어 함창, 상주벌판으로 나아가기 전 영강을 따라 굽이치는 협곡 바위벼랑을 가로지르는 관갑천 잔도는 실로 눈물 없이는 넘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양에서 동래로 향하는 영남대로 상에는 다섯 개 정도의 천도가 있었는데, 그중 관갑천 잔도와 밀양에서 양산으로 넘어가는 작천 잔도가 험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이곳 관갑천은 험준한 새재를 다 넘었다고 한숨을 놓을 즈음 만나게 되는 터라 더욱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관갑천 잔도


기록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과 상주성을 다투기 위해 새재를 넘어 남쪽으로 쳐내려와 이곳에 이르러 길을 찾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졌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도망 가면서 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관갑천을 ‘토끼비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대의 토목기술자들은 이 토끼비리의 중간을 가로질러 잔도를 냈습니다. 단단한 바위벼랑을 오목하게 안부 모양으로 잘라내는 일은 보통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관갑천 잔도를 보며 이곳을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 또 사람만이 아니라 짐을 실은 수레는 어떻게 지나갔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곳은 단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오솔길이 아니라 간선도로로써 국가의 대동맥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영준 교수는 문경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발구’를 재현해보면 어느 정도 그 답을 알 수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발구는 썰매와 비슷한 수송수단으로 소가 끄는 수레입니다. 오목한 안부 모양으로 파낸 잔도 위에 나무판대기로 길을 만들고 그 위로 발구가 움직였을 것입니다.


로마 간선도로의 폭이 10M 내외였다고 하는데 영남대로의 폭도 그 정도였으며 좁은 곳은 4~5M 정도였다고 합니다. (최영준/고려대 지리학과 교수,『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영남대로와 문경」참조) 로마의 간선도로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는 얘깁니다. 바꾸어 말하면 새재에는 수많은 전설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문경의 명물 박달나무.

홍두깨는 문경에서 나는 박달나무로 만들어야 한다.

그 문경새재를 우리 가족들이 넘기로 했습니다. 처음 계획은 아들과 둘이서만 떠나기로 했던 것인데, 아내와 딸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생각했던 문경새재 1관문, 2관문, 3관문을 넘고 안보를 지나 중원 미륵사지까지의 행군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수정해 문경새재를 넘은 다음 고사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수안보로 가서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월악산 송계계곡으로 가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미륵사지를 답사하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배낭을 챙겨 길을 떠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길만 나서면 하늘이 꼭 이런단 말이야.”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살펴본 결과에 의하면 내일은 화창하게 맑은 날씨를 제공해주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기상청이 ‘구라청’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는 마음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새재 1관문 입구 모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침 햇살이 여관 창문으로 눈부시게 파고들었습니다.

제2관문 조곡관

조곡관 앞에 있는 해태상의 코를 칼로 긁어갔다고 우리 아들이 손짓을 한다. 살펴보니 진짜다. 누가 그랬을까요?

새재 길에 들어서니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길이 꽉 차 있었습니다. 영남대로가 번창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길 양 옆으로 펼쳐진 주흘산과 조령산의 풍광이 참으로 절경입니다. 조선의 과객들이 동쪽의 죽령과 남서쪽의 추풍령을 마다하고 굳이 이 길을 택한 데는 아름다운 풍광도 한몫 했으리란 생각을 해봅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한양에 들면 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과시에 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령으로 넘어가면 죽죽 미끄러져 시험에 떨어진다거나,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시험에 떨어진다는 속설을 들으면 옛사람들도 요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재미나기도 하지만 TV에서 보던 형식적 유교에 찌들어 근엄을 떠는 양반네들의 가식적인 모습보다 풋풋한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주니 참으로 정겹기도 합니다. 문경은 들을 문(聞 )에 경사로울 경(慶) 자를 씁니다.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아, 우리도 저 고개 꼭대기에 다다르면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라나요? 그런데 이미 저 앞에 암벽을 우뚝하니 세우고 솟아있는 아름다운 부봉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듯합니다. 새재 길 따라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듯합니다.

이진터. 1592년 신립은 1관문에 1진을 이곳에 2진을 배치하고 왜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무주암. 먼저 앉으면 임자란다. 미리 준비된 술과 안주를 먹고 값은 돈통에 알아서 내고 갔다고 한다. 무인주막...

무엇보다 가장 즐거운 것은 마사토로 잘 닦여진 새재 길입니다. 날씨만 따뜻했다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고 싶었습니다. 1관문을 지나 3관문까지 우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진도 찍어가며 그렇게 흥겹게 올랐습니다. 아, 누가 문경새재를 눈물 없이는 넘을 수 없다 했습니까?


새재…, 정말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도보여행가 한비야가 말한 것처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불러도 하등 부끄러울 것이 없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여기에 제 느낌을 하나 더 보태면 한국에서 가장 푸근한 길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편안한 길이라 한들 고개는 역시 고개입니다. 꽤나 땀을 빼고 3관문에 이르니 천하가 다 내 것이 된 듯한 기분이 상쾌합니다. 이제 저 문만 나서면  충청북도 땅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내리막길을 걸어  고사리까지 한참을 걸었습니다.


충북 쪽은 길이 포장이 되어 있어 문경 쪽처럼 그리 훌륭한 운치를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내려오니 고사리에 당도했습니다. 신선봉(월악산 국립공원) 열두폭 병풍바위가 그림처럼 펼쳐진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풍치를 가진 마을이 우리나라에 몇 군데나 있을까요?


제3관문까지 이렇게 길이 좋다. 조곡관에서 조령관까지는 꽤 가파르다. 보통 사람들은 조곡관까지만 간다.

제3관문 조령관. 저 문을 나서면 충주시 수안보면 고사리다.


그러나 수안보로 가는 2시 45분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내려온 우리는 허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내버스가 고장이 났다는 것입니다. 버스 뒤쪽 엔진실 뚜껑을 열어보던 기사 아저씨는 수리차가 올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허허...


아무 대책도 없었습니다. 대신 올라올 차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사 아저씨에게 “그럼 다음 차는 언제 오나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글쎄 대답이 더 대책이 없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글쎄요. 다음 차가 5시 15분차고 그게 막차지만, 그것도 올라올지 안 올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허무맹랑한 일이 있습니까? 그나저나 이거 큰일 났습니다. 기사 아저씨에겐 더 물어보아야 소용이 없을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그토록 아름다운 신선봉 아래에서 의논한 결과 그냥 걸어서 수안보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원래 계획도 걸어서 안보를 지나 미륵리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를 물어보니 약 6Km쯤 된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내리막길이니 아무리 아이들이 딸렸다고 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싶었습니다.


아, 그런데 동화책 같은데 보면 이럴 때 꼭 왕자님이나 구세주가 나타나 구해주지 않습니까? 아니 이곳은 신선봉 아래이니 도사님이라고 해야 되나요? 하여간 구세주인지 도사님인지 모를 분이 옆에 있다가 끼어들었습니다. 어쨌든 왕자님은 아닌 거 같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시내버스가 낡기도 낡았다. 산골사람들이 너무 순박하다. 도시라면 난리가 났을 걸!

트럭 짐칸에 쭈그리고 앉아 어렵사리 사진을 찍었다. 트럭에는 곶감 천지였다.

“저… 수안보 갈거므는… 여기 트럭이라도 타고 갈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다믄… 나도 수안보 갈거거든요….”


너무나 당황했던 우리는 바로 옆에 그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트럭 앞자리는 우리 네 식구가 다 타기에는 좁디좁아보였습니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아내와 아이 둘을 앞자리에 태우고 나는 짐칸에 올라탔습니다. 천막으로 가려진 짐칸을 걷어보니 안에는 짐이 가득합니다. 상자를 몇 개 들어 옮기고 거기에 조심스럽게 올라앉았습니다.


터덜거리며 내려오는 트럭 짐칸에서 짐짝처럼 흔들거리는 엉덩이에 아스팔트의 딱딱한 기운이 콩콩거리며 올라붙습니다. 그렇지만 이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 너무나 신나기만 합니다. 엉덩이를 치며 달려드는 아스팔트의 둔탁함이 이렇게 즐겁고 기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수안보의 한 온천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최대한 편한 자세로 몸을 푹 담그고 앉은 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음… 역시 문경은 聞慶이군. 고개도 편안하고, 또 고개를 넘으니 이토록 평생 잊지 못할 추억까지 만들어주다니…. 역시 경사스런 소식을 들려주는 동네임에 틀림없는 거 같아….”

중원미륵사지의 미륵불.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다.

미륵불 앞에 일직선으로 늘어서 월악산을 바라보고 있는 석등과 석탑. 저 아래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다.


월악산 송계계곡의 어느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다음날 중원미륵사지를 보기 위해 하늘재로 갔습니다. 미륵사지에는 미륵불이 앞에다 석등과 석탑을 일직선으로 세운 채 멀리 송계계곡 너머 북쪽을 바라보고 홀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미륵불 앞에 제사상을 펼쳐놓고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는 보살님의 모습이 낯설어 보였습니다.


하늘재 너머 관음사지까지 보고 싶었으나 참았습니다. 갑자기 무리하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 하늘재 초입에서 맛보기로 500M 정도만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월악산 국립공원이라지만 새재 쪽에 비해 썰렁합니다. 관리가 부실한 거 같습니다. 2천년 하늘길을 남겨두고 내려오려니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천년을 이어오던 하늘재 길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바로 옆 새재에게 간선도로의 기능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제시대에 이화령(이우릿재)에 신작로가 뚫리자 새재 역시 그 기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새재는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건설교통부가 이곳을 포장하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나서서 차량 통행을 반대하면서 대통령에게 진정까지 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문경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던 인연으로 이 고을 사람들의 청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포장 계획은 백지화됐습니다.


문경유교문화관 이만유 문화해설사 선생님. 우리 가족을 학생으로 열심히 강의중이시다. 대단한 열정이시다.

문경은 막사발이 유명하다. 조선의 막사발을 국보로 보존하는 일본인들이 문경 도요지를 즐겨 찾는단다.


개발만이 능사로 아는 요즘 사람들로서는 당시 문경 주민들의 청원이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릅니다. 특히 현 정부의 인사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때 문경새재를 확장하고 포장했더라면 지금처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칭송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문경새재는 이제 더 이상 눈물 없이 넘을 수 없는 고개가 아니었습니다. 행복과 기쁨을 주는 편안한 길이었습니다. 신체의 건강과 마음의 여유를 주는 유익한 길이었습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꼭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땐 정말 신발, 양말 모두 벗고 맨발로 고갯마루에 서고 싶습니다. 새재 길따라 함께 내려오는 계곡물에 여름 햇살에 달구어진 두 발을 담그고 싶습니다. 그리고 단풍이 온 산을 붉게 태울 가을에도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눈 내린 하얀 길을 걷는 것도 특별할 것입니다. 철마다 변화하는 이 길을 모두 느끼고 싶습니다.


사실은 제가 이곳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때 부산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정든 고장을 떠나긴 했습니다만…. ㅎㅎ


2009. 2. 28(토)  파비


※ 문경새재유스호스텔을 예약하려고 했으나 빈 방이 없었습니다. 유스호스텔에 미리 예약을 해두면 편리할 뿐더러 시설에 비해 가격도 저렴합니다. 가족실(4인 기준) 5만 원입니다. 할 수 없이 모텔에서 잤습니다. 문경관광호텔도 있지만, 조금 부담 되겠습니다. 디럭스 기준, 성수기에는 13만 원 비수기에는 8만 원 정도 합니다. 유스호스텔 옆에 스머프황토펜션도 있습니다. 8평짜리가 7만 원입니다. 1가족에 적당한 크기입니다. 모텔은 비수기에도 보통 4만 원 받습니다. 아무래도 관광지니까요.


불정자연휴양림에서 잘 수도 있지만, 새재 관문까지 차를 타고 이동해야한다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지나친 불편은 재미를 떨어뜨립니다. 제 경험으로는 새재 관문 앞에 있는 유스호스텔, 스머프펜션, 관광호텔, 새재모텔 순으로 권장합니다. 단체로 간다면 유스호스텔 외에도 청소년수련관이 있습니다. 꼭 청소년 아니라도 이용 가능합니다. 10명 기준, 10만 원 정도면 됩니다. 여기도 규모의 경제가 작동합니다. 말하자면 30명 기준 20만 원입니다. 이상 제가 대충 조사한 것인데, 조금 틀릴 수도 있습니다. 조금 오차가 있어도 제 탓 너무 마시고 미리미리 조사하시는 게 유익합니다. 저는 사전조사에 실패했습니다. 고맙습니다.  


※2. 새로 장만한 캐논450으로 열심히 무려 537장의 사진을 찍었으나 조작법이 서툴러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을 어떻게 올리는지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습니다. 다행히 실수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몇 장의 사진은 블로그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올리고자 지금도 계속 헤매면서 ‘조물딱’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