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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초패왕의 자살

괄막약의 역저 『족발』은 맹부자출처를 비롯하여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쓴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거기에는 맹자, 공자, 장자, 항우, 진시황, 사마천, 노자, 가의, 그리고 두 명의 제나라 용사가 등장한다. 또 공자를 만나기 위해 멀리 서양에서 찾아온 마르크스도 등장한다.

이 책이 어느 날 홀연히 책장에서 걸어내려 와 방바닥을 뒹굴게 되면서 나는 14년 만에 다시 고대 중국의 명인들을 만나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2200년 세월의 벽을 넘어 항우를 만나보는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다.

‘역발산기개세’ 항우의 자살
항우는 초한지에 등장하는 유방의 맞수다. 그래서 우리는 항우를 잘 알고 있으며 '역발산기개세'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는 것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항우는 유방에게 패함으로써 천하제패의 꿈을 접었다.

해하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항우, 부인 우미인마저 자신의 초전검으로 자결하자(항우와 우희의 애달픈 생사이별을 노래한 ‘패왕별희’는 너무도 유명하다) 남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오강에서 처절하게 싸우다 스스로 목을 베어 파란만장한 생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곽말약의 족발에서 항우에 대한 이야기의 제목은 「초패왕자살(楚覇王自殺)」이다. 그러나 곽말약이 그려낸 초패왕의 자살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항우는 용맹한 장수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에 못지않은 종리매를 비롯한 용맹한 무장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의 부대는 천하무적이었다. 그가 비록 해하전투에서 패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용맹은 시대를 넘어 회자되고 있다.

그런 그가 그리 허무하게 죽었을까? 아니다. 그의 죽음은 장렬했다. 그는 용맹한 부하들과 더불어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했다. 항우에게 전장은 따뜻한 고향의 품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최후를 맞이할 장소로서 전장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전장이야말로 그가 살아온 곳이며 그가 죽어야할 곳이었다. 그러나 곽말약은 죽음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무인은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용사에게 죽음이란 천하만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항우의 최후가 장렬하기는 하였으나 곽말약의 관점에서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명예에 집착하는 헛된 죽음일 뿐이다.

장강에 이는 풍운(風雲)
연일 내린 폭설로 오강포 부근 우저산과 백벽산 일대는 온통 새하얗게 뒤덮였다. 솟아오른 아침 태양에 흰빛만이 반짝이며 저항할 뿐 인적은 끊어지고 새 한 마리조차 날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흰빛에 정복되어 있었다. 저 휜 눈에게 항복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지칠 줄 모르고 흐르는 장강과 하늘의 태양뿐이다.

이곳에 난데없이 한때의 군마가 어지러이 달려오고 있었다. 넓은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처럼 강변에 당도한 웅장한 소리는 스물일곱 명의 사람과 스물일곱 마리의 말이었다. 그들이 강가에 다다르자, 그 기세는 강변에 부서지는 물결의 포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들의 대장을 태운 말은 검푸른 빛을 띠며 아직도 더 달리고 싶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강을 향해 연신 울부짖으며 뿌연 김을 내뿜고 있었다. 말의 주인은 매우 지쳐있었다.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한군데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강가에 버려진 조개껍데기처럼 널려 있었다.

말들도 기진맥진했다. 기수가 내리자마자 모래톱에 긴 수면을 취하려는 듯 쓰러져버렸다. 검푸른 말만이 앞발로 모래톱을 연신 차대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대장인 듯한 사내는 잔뜩 충혈 된 두 눈으로 분노하듯 장강을 노려보았다. 나이는 30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항우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오강(烏江의) 정장(亭長)
이때 고요를 뚫고 한 척의 나룻배가 나타났다. 배 위에는 중년의 남자가 노를 젓고 있었는데 예사 사공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생김새는 여위었으나 넓는 이마 아래 두 눈에선 지혜어린 광채가 발하고 있었다.

“대왕. 제가 틀리지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당신은 틀림없는 우리의 서초패왕이십니다. 뒤를 쫓아오는 병사들이 곧 들이닥칠 것입니다. 어서 배에 오르십시오.”

대왕이라 불린 이 사내는 바로 서초패왕이라 자칭하던 항우였다. 그랬다. 모두들 조개껍데기처럼 널려졌지만, 유독 그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던 검푸른 말은 다름 아닌 천하의 명마, 오추마였던 것이다. 항우와 그의 부하들은 유방의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년을 이어오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진시황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다.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부역, 병역을 부과해 국가경제의 기반이던 농민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다. 분서와 갱유는 수천 년에 걸친 중국의 문화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어놓았다.

항우, 진시황을 능가하는 폭정으로 민심을 잃다
진시황이 죽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봉기를 주도하던 진승, 오광 그리고 시정의 평민들을 이끌고 유방이 있었다. 거기에 항우도 봉기의 한 세력을 담당했다. 항우는 숙부인 항량과 더불어 출전했다. 그들은 파죽지세였다. 이때 항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칭호를 얻었다.

결국 진나라는 봉기세력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폭정을 일삼는 진왕조의 전복이란 백성들의 염원이 반영된 결과였다.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득의양양했다. 자신의 역발산기개세가 진왕조를 멸망시킨 것이다. 이제 그에게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초 항우는 사람됨이 좋고 힘과 용기까지 갖추어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패자가 되자 자만심이 그를 지배했다. 진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오로지 그의 능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항우는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진의 수도 함양의 궁실과 각종 서적들을 불태웠다. 무고한 아녀자를 무참히 살해했다.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와 갱유를 능가하는 폭정을 자행했다. 민심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민심이 떠나자 항우는 더 이상 역발산기개세가 아니었다. 이어 벌어진 유방과의 패권다툼에서 항우는 연전연패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초패왕
유방의 군사에 쫓긴 항우의 앞에는 장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불과 수십 리 밖에는 그의 목을 베어 공을 세우려는 무리들이 휜 눈을 날리며 쫓아오고 있다. 이때 오강의 정장이 나룻배를 끌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를 구하기 위해. 그러나 항우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속였던가. 음릉에서 한왕에게 쫓기다 길을 물었을 때 늙은 농부는 그를 속여 서쪽으로 가게 하여 속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연도(沿道)의 주민들은 밥과 따뜻한 국으로 그를 맞지 아니하고 집을 텅 비우고 모두들 도망을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야속한 것은 하늘이었다.

실로 기진맥진한 그들에게 눈을 내려 고통을 더해주는 하늘이 가장 미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강도 더할 수 없이 미웠다. 공교롭게도 그가 오는 것을 기다려 배를 정박하고 있는 정장이 마치 하늘의 화신인양 생각되었다.

‘음릉의 늙은 농부와 연도의 주민들도 다 하늘이 조종해놓은 것이다. 아, 내 앞에 서서 배에 타기를 권유하는 이자는 틀림없이 첩자다. 나는 물에 익숙하지 못하다. 내 부하들도 모두 북쪽사람들이라 물의 특성을 알지 못한다. 이놈이 그걸 알고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다.’

초패왕은 불끈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 모든 것은 하늘이 안배한 것이다. 하늘은 궁극적으로 나보다 강하다. 내 어찌 하늘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늘은 초패왕을 버렸는가?
칼자루에서 손을 뗀 항우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말했다. “배에 한 명밖에 오를 수 없다면 여기 종리매와 나의 오추마를 데려가게. 종리매는 나의 가장 훌륭한 전우이지만 지금 그는 너무 다쳐 몸을 움직일 수도 없네. 내가 아끼는 이 오추마도 전장에서 죽게 하고 싶지 않으니 데려가 살려주게.”

초패왕은 뜻밖에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너그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함양을 정복한 이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웃음이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사기』의 「항우본기」에 등장하는 항우의 말을 곽말약은 다음과 같이 옮겨놓았다.

‘이것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다면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숙부와 더불어 회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우리가 8천명의 강동 젊은이를 이끌고 강을 건너 싸우기를 8년, 70여 차례의 싸움을 치르고 난 지금엔 모두들 죽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숙부께서도 일찍이 정도에서 전사하셔서 이제 나 혼자만이 남았다. 나 혼자 강동으로 돌아가 설령 강동의 노인들이 나를 가엾게 여겨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과 만날 수 있겠는가?’

정장은 계속해서 항우에게 배에 오르기를 권했지만, 끝내 항우는 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종리매와 오추마를 그의 부하들을 시켜 배에 태우게 했다. 그리고 항우는 왼손으로 힘차게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나머지 스물다섯 명의 장사도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동시에 방패를 들어올렸다.

초패왕의 장렬한 최후
적들의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 들려왔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됨직하였다. 항우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항우의 초전검과 함께 스물여섯 줄기의 검광이 휜 눈에 반사되어 무수한 무지개를 뿜어냈다. 스물여섯 줄기의 검광은 말을 달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무더기의 거대한 파도가 부딪히자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항우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부하들이 모두 죽자 두려워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는 적 앞에서 우희가 자결한 초전검으로 스스로 그의 목을 베었다. 역사에 의하면 그의 목을 차지하기위해 다투다 수십 명이 밟혀 죽었으며 항우의 시신은 다섯 동강이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시신의 각 부분을 차지한 장수들은 공훈을 인정받아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장국영 주연의 『패왕별희』의 한 장면/이미지출처=다음영화


멀리 강 한 가운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정장은 종리매에게 고백한다.

“종리매 장군. 사실 저는 정장이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서생일 따름이지요. 하지만 이곳의 정장이 달아나버렸으니 정장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요. 애초에 호의를 품고 여기에서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왕의 첩자는 아니올시다. 당신도 이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겠지만 오늘날의 백성들 특히 우리 글 읽는 사람 가운데 항왕에 대해 그 누가 아직도 좋은 뜻을 품고 있겠습니까? 그 자신이 민심을 저버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에 사람이 좋아 민심을 얻었습니다. 진시황의 폭정에 시달린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진나라 통치를 뒤엎으려했습니다.

민심을 저버린 항왕, 더 이상 역발산기개세는 없다
이러한 백성들의 뜻에 부응한 항왕은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두들 자신의 생명을 아까와 하지 않고 그를 돕고 추대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2년도 채 못 되어 진나라 사람의 폭정을 뒤엎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힘어었습니까? 그것은 항왕의 힘이 아니라 백성들의 힘이었습니다.

항왕이 역발산기개세일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떠난 항우에게 더 이상 역발산기개세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항우는 자기보다 훨씬 약한 유방에게 패하고 만 것입니다.”

“종리매 장군! 하지만 저는 오늘 항왕이 당신과 이 말에게 보여준 태도를 보고 매우 감동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에 친구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득 생각난 것인데 당신도 알 것입니다. 한왕 유방은 도망갈 때 자기 자식들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렸다는 얘기 말입니다.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모습이지요.

항왕은 이점에서 유방보다 더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러한 마음을 널리 베풀었다면 그는 결코 오늘 같은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그를 죽이려던 마음을 바꾸어 그를 살려주어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자신의 실패를 하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운명은 하늘 탓이 아니다
정장은 계속해서 말한다. 자기 잘못을 알아야지 어찌 하늘을 탓하는가? 하늘은 말이 없다. 항왕이 들먹거리던 이 하늘이었고 한왕이 들먹거리던 하늘도 이 하늘이다. 백성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저 자신만의 권세를 생각하고 백성의 생사 따위엔 개의치 않던 사람이 자멸의 걸어갔다고.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만 생각했다고.

이어 정장은 항우를 따라 죽고자하는 종리매에게 이런 말로 타이른다.

“장군. 죽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필사적인 마음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사람됨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 저의 집이 여기서 않습니다. 제가 배를 돌린 이유는 당신을 저의 집으로 데려가 부상을 치료하고 잘 쉬게 한 다음에 당신으로 하여금 다시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초패왕자살>은 지칠 줄 모르고 흐르는 장강의 충고로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장강은 말한다. “너희들이 아무리 잘난체해도, 너희들이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갖고 거드름을 피워도 결국은 모두 나에게로 녹아 흘러들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에게로 와 함께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게 어떻겠는가?”

『족발』, 해학과 기지가 돋보이는 명작
곽말약은 참으로 신묘하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린 초패왕과 초나라 군사들. 그들은 짙은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초가(楚歌)에 전의를 완전히 빼앗겼다. 하나 둘 탈영이 이어지고 마침내 소수의 부하들과 자신만 남게된 초패왕,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명예롭게 죽음을 택하는 길외엔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곽말약은 초패왕의 비장한 최후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살려놓았다. 날렵한 해학과 날카로운 기지가 다시금 돋보이는 작품이다. 곽말약의 작품도 뛰어나지만, 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 신진호의 순발력 또한 뛰어나다. 그는 원제 <楚覇王自殺>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늘은 초패왕을 버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