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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야기

대북삐라로 본 진보와 수구의 차이?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 극우파 단체들은 계속해서 대북삐라를 북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촛불시위를 공권력으로 진압하던 MB정부도 여기엔 속수무책인 듯싶습니다. 아니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정부의 태도에 대해 여러 곳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음 블로거뉴스>에서도 많은 블로거들이 반북단체의 무모함과 정부의 무책임함에 분노의 화살을 쏘았습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결국 며칠 전, 다시금 대북삐라를 살포하는 반북단체와 이를 저지하는 한국진보연대 간에 활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면서 과연 진보단체는 잘 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신념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부적인 기본권을 말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명박 정권을 감히 독재정권과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반대의 권리를 말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며 그렇다면 진보(단체)는 과연 우리가 비판해마지 않는 수구우익들보다 나은 게 무엇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그 회의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좋을 글이라 생각됩니다. 진보신당 게시판에 실려 있던 글을 원작자인 산하님의 허락을 받아 여기 게재합니다. 자기 글 외에는 블로그에 싣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보다 차분하고 지혜로운 처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반대의 생각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2008. 12. 4.  파비

한국진보연대에게 묻는다

 자유의 다리에서 벌어진 일대 활극을 인상 깊게 보았다.  왕년에 데일리 프로그램하면서 6밀리 카메라 하나 들고 산지사방 뛰어다니던 때라면 기꺼이 자유의 다리로 달려가서 한몫 거들었으리라.  취재하는 입장에서야 이른바 '노나는' 아이템이었겠지만 지켜보는 이로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풍경이었음도 분명하다. 

 우선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내갈기는 "이 빨개이 쉐키들이…"란 욕설은 내게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저 말투로는 "불러도 불러도 그 자애로움이 끓어 넘치는 어버이 수령님"을 뇌까림이 어울린다는 것이 내 고정관념이었던가 보다.   군부 정권 이래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금기인 총 (가스총일지언정 실제 총 모양의)을 허공에 대고 발사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분들의 과잉행동장애를 보는 듯 했고, 몽키를 휘둘러 사람 머리를 찢은 분들은 법보다는 주먹으로 해결하는 일이 더 많았다는 공화국 폐습을 아직도 벗지 못한 듯싶다.  

북한으로 삐라를 날려보내는 반북단체 회원. 사진=경남도민일보

 
 그러나 또렷한 서울 말씨로 들리는 몇 마디의 말들은 나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중의 한 마디는 바로 이 말이었다.  "왜 나왔냐? 거기서 왜 나왔어?"    감정이 격해서였을지는 모르나 그 말은 분명히 짧았고 경멸 내지는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잔뜩 배어 있었다.  

 현장에 있었더라면 나는 즉시 그 사람의 얼굴에 바짝 카메라를 들이대고 물었을 것이다.  "왜 나왔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아마도 솔직한 대답은 듣지 못할 테지만, 나는 집요하게 물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한국 진보 연대라는 이름의 단체에 묻고 싶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대체 저 탈북자들이 왜 자기 살던 땅에서 목숨 걸고 헤엄쳐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몇 나라의 국경을 돌파하여 오늘날 남한에 사단 병력으로 거주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 단체의 입장은 무엇인지 듣고 싶기 때문이다.  
 
  진보는 태생적으로 반역이다.  그 색깔의 옅고 짙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존의 질서가 가지는 억압의 창살을 걷어내는 일이다.  보다 많은 이들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현 상태와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이며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사람들의 뇌리와 등짝에 드리워져 있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대한 전환의 키를 제시하는 것을 그 생명으로 한다.   그 진보가 탈북자들에게 물었다.  "왜 나왔냐?"고.  몰라서 묻는 것일까.  북한 당국의 말로 수십만이 굶어 죽었던 고난의 행군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정녕 알지 못하여 그러는 것일까.   그 진보의 생각은 무엇일까.   " 제 조국 버리고 나온 이들의 말을 믿을 필요 없다"는 것일까. 

 북한의 관리가 볼멘소리로 "촛불은 막으면서 삐라를 못 막느냐"고 했다지만 적어도 진보라는 이름을 자칭하여 스스로의 단체를 치장하는 이들이라면 그 말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조국통일을 방해하고 6.15 선언을 깨뜨리는" 삐라 살포를 공권력으로 막으라는 요구를 한다면 촛불에 물대포를 쏘아댔던 어청수가 우수한 CEO 상을 받는 우스개에 배꼽을 늘어뜨릴 자격을 일정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삐라를 막는 정부라면 촛불을  통일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위하여서는 탈북자들과 납북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도 될까?   몽키를 휘둘러 사람 머리를 찢어 놓은 행동은 처벌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그런데 진보연대 회원들이 그들의 삐라를 '압수'했던 것은 어떤 탈북자의 지적대로 "합법적"인가?  그리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을 상대로 시위할 수는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나 역시 탈북자들의 삐라보다는 진보연대의 유인물에 공감을 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거나 그들의 시위용품을 탈취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반민족적 행위이고 반통일적 행동을 비판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제기하자.   정부가 탈북 단체들을 선동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면   그 지점을 타격하자.   상호비방을 금지했던 합의를 우리 스스로 어기지 말자고 외쳐 보자.   그러나 삐라 살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고 나서고 삐라를 '탈취'하는 지경에 이르면 '한국 진보 연대'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진보의 사고의 유연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진보는 끊임없는 의심의 과정이다.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지점이 정체가 아닐까, 나의 생각이 어느새 굳어진 도그마가 아닐까,   나의 세계관이 어느새 케케묵어버린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진보는 생명력을 얻고 활기를 잃지 않게 되는 법이다.  우리의 진보는 휴전선 앞에서 멈추고  그 추상같은 비판의식은 판문점에서 무조건적인 민족애로 승화되어 왔다는 힐난을 괘씸하게 여겨 물리치기 이전에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의 인권 문제를 엉뚱하게도 인권에 관심이 전혀 없던 세력이 선점해 가 버린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 모르니 말을 할 수 없다는 덜떨어진 앵무새가 진보의 상징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굶어죽지 못해 탈출한 사람들에게 왜 조국을 버리고 나왔냐는 강짜가 이른바 진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 되지 않겠는가.   어제 가스총을 쏘고 몽키를 휘두른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있고 들어야 할 말이 있다.  자신의 생때같은 가족이 북한에 의해 납치된 (또는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 "누가 납치를 해?" 따위의 억지스런 반문을 하는 것은 진보의 화법도 아니며 듣는 자세도 아니다.   그들을 가로막다가 머리가 찢기는 용기는 물론,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설득하는 지혜도 역시 진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2008. 12. 4. 산하/진보신당 당원